<근대 일본의 미학과 예술 연구>
by 카토 테츠히로 (Kato Tetsuhiro, 加藤哲弘)
이 논평은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일본의 예술 연구, 대표적으로 미술 사학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발제에 앞서, 먼저 이 “미학”이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정의가 필요하다. “미학”의 직관적 해석은 전문 분야를 가르키고 있다. 즉, 좁은 의미로 미학이라는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 연구, 특히 철학이라는 넓은 연구 영역 속의 한 전문 분야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서 강의되는 과목의 명칭으로 우리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미학의 경우, 미술 사학과 달리 이 좁은 의미로의 미학이라는 언어의 의미는 반드시 항상 정확하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학에서 “미학”이 강의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전문적인 철학적 미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이 논평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구체적으로 메이지 초기, 미학의 도입으로부터, 1900년 오오츠카 야스지가 도쿄 대학의미학 강좌 주임에 부임하기 까지)의 미학에 적용된다. 이 시기, 이미 몇몇 대학에서 “미학(심미학)”의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강의의 대부분은 본래의 철학적 미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비평론, 혹은 강사들 자신의 예술관을 표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논평에서 이 좁은 의미의 미학과 넓은 의미의 미학을 구별하면서 주제를 2단계로 분리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처음으로 일본 대학에 전문 분야로의 철학적 미학(좁은 의미의 미학)이 도입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전문 분야로서 미술사학이 성립되어 온 과정에 대하여 서술한다. 이어서, 이 과정을 독일의 사레와 비교하면서,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비롯한 미술 연구의 강의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독일과의 사례에서 밝혀진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독일에서도 미학은 “철학부” 내 전문 분야이면서, 일종의 일반 교육 과목으로 이른반 넓은 의미의 미학이 연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미학은 독일에서 19세기 후반부터 실증주의적인 과학의 제도적 발전이나 학문의 전문 분야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미학 속에서 성립된 예술 연구, 특히 미술 사학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점을 염두하고 미학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넓게 19세기 후반의 미술을 애호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예술관의 내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시기, 유럽이나 그 영향을 받은 지역의 “미학자”는
신고전주의적 예술관을 이미 흡수하고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근대미술 연구의 역사를 돌아보고 이 19세기 “미학”을 일본이 어떻게 검증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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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 미학의 시초
일본 대학에서는 예술학과 예술사 연구자나 학생이 문학부의 철학과와 미학과에 소속되어 있는 케이스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전문 분야로서의 미술 사학이 성립될 때까지의 역사적 경과를 돌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미술 사학은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전문 분야로서 많은 연구자나 학생이 투입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학은 보다 소규였으며, 미술사학의 본질은 미학으로부터 탄생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도쿄 대학에서 일본의 첫 “심미학” 강의는 1881년(메이지 14년)에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스펜서파 사회학을 전공한 토야마 쇼이치가 이 강의 담장자였으면 1882년부터는 어니스트 페놀로사(Earnest Francisco Fenollosa)로 바뀌었다. 페놀로사의 강의 내용은 스펜서의 예술 유희론과 칸트의 미적 판단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강의되고 있었던 “미학"은 철학의 일부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강의에서는 서양 미술사와의 관계도 다루며, 일본 미술의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도 역설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1882년은 그의 “미술 진설”이 강연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페놀로사는 1886년에 "도쿄 미술학교" 창설 준비 때문에, 오카쿠라 덴신과 함께 유럽 시찰에 나간다. 그의 후임으로 심미학 강의를 맡은 것은 미국에서 온 녹스(Knox)였다. 또, 1887년부터 1892년까지 독일인 시인 부세(Busse Carl)가 1893년부터는 러시아 출생의 쾨벨(Koeber)이 이 강의 담당자였다. 이 사이에 강의 명제는 1889년에 “심미학 미술사”로 개칭되었고, 2년 후에는 "미학 미술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개칭은 학과 재 편성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가령, 1889년 개교한 도쿄 미술학교에서 과목 명칭이 “미학 및 미술사”로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배후에는, “미학"이라는 역어가 일본에 정착된 것이나, 미학 강좌에서 구체적인 미술 사례의 해설이 동시에 이루어 지는 일이 일반적인 것이 된 역사가 반영되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강의 명칭에 미술사라는 언어가 추가된 결과, 제국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외국인 교사들이 “미학미술사”의 강의 안에서 서양미술사의 개요를 서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철학자가 “미학” 강의에서 미술, 음악 혹은 문학적 역사에 대해서 강의하는 것은 유럽에서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단, 이 때 강의된 미술사(또는 음악사, 문학사)는 나중에 특수한 “전문 분야”로서 독립하는 미술사학의 내용과는 기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강의는 어디까지나 주로 고전, 고대 세계에 대한 일반적 상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미술사는 이른바 철학이나 작품 제작을 위해서 지식을 제공하는 “보조학”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1893년(메이지 26년)에 이른바 강좌제에 의해 미학 강좌가 개설되면서, 미학 전문 후계자 양성이 본격적으로 의식되면서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미술사는, 미학과에 안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파악하고 그것을 조형 예술의 역사 안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연구자가 생겨났다. 그 결과 1914년(다이쇼 3년)에 미학 제2강좌로 미술 사학 강좌가 개설되고, 일본 미술사학자 다키 세이치가 부임했다. 단 이것이 미술사학이 미학으로부터 완적히 독립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구체적인 연구 내용이나 방법론으로는 이미 실증 주의적 역사학 개념도 도입되었다. 또, 이 시기의 미술사학이 대학의 미학과 안에서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나 교토 제국대학에서 미술사학이 미학의 제2강좌로 개설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선택 사항”의 성장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이 일본 미술 사학의 기본적 성격 형성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本稿は、1999年に平凡社から刊行された『語る現在、語られる過去 ―日本の美術史学100 年』(東京国立文化財研究所編)に収録されたわたしの論文「近代日本における美学と美術 史学」(pp.32-42) に若干の修正を加え、出版社からの許可を得て再録したものである。
출처 : http://homepage2.nifty.com/katotetsu/tk01text.pdf#search='美学+pdf'